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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일제시대 사회주의 분파의 형성

by 저너 20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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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파문제에 대한 인식

화요-이르쿠츠크파의 조봉암, 조훈, 남만춘은 이 시기 분파투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전 역사는 여러 공산주의 그루빠들의 끊임없는 분파투쟁의 역사이며, 4개의 당 중앙위원회(두개의 이르쿠츠파와 두 개의 상해파) 그리고 조선공산주의 조직의 통일 및 당 창건을 위한 7개의 조직 뷰로 및 위원회(1.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산하 오르그뷰로, 2.통일적인 베르흐네-우진스크 당 대회 소집을 위한 조직위원회, 3.블라디보스톡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부 꼬르뷰로, 4.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부 꼬르뷰로 국내부, 5. ‘13인 회의와 이후에는 김사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도자들을 포함한 ‘15인 회의이름 아래 있던 꼬르뷰로 통일적 국내부, 6. 블라디보스톡의 코민테른 동양부 오르그뷰로, 7.4월 당 대회 소집을 위한 국내조선 오르그뷰로)의 청산의 역사이다.

 

이것은 화요파조선공산당의 창건에 이르는 기간에 존재한 숱한 우여곡절과 동시에 분파투쟁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복잡한 분파투쟁과정의 산물로서 19254월 조선공산당은 탄생했다.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은 이 시기 분파의 형성 원인과 분파투쟁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1929년 조직된 볼세비키 그룹의 김호영은 다음과 같이 분파투쟁의 원인을 분석했다. 첫째, 모든 주체적 조건이 미숙한 가운데 프롤레탈리아 운동이 전위조직 운동부터 시작된 것, 둘째, 민족운동의 봉건적 파쟁운동이 공산주의 초기 조직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 것, 셋째, 나라 밖 곳곳에서 당 조직이 따로 따로 계획되면서 조직상 조그만 차이점을 발단으로 감정이 쌓인 것, 넷째, 공산주의 운동이 비밀운동인 것을 핑계로 파쟁시 생장 보호된 것, 다섯째, 공산주의 대열 거의 모두 소부르주아지 또는 봉건층에 속했던 인테리켄차와 학생들이었던 것 등이다. 또한 'ML파의 활동가였던 고경흠은 1931조선전위당 볼셰비키화를 위하여라는 문건에서 당내에 존재하는 불순한 무원칙적인 파쟁당의 실천적 투쟁을 완전히 저해하고 규율을 완전히 파괴하고 당의 비밀을 지배계급에 팔아먹는 도배까지 나타나게 하여 당에 대한 대중의 계급적 신임을 유린해 버렸다고 말하면서 당의 과거의 일체의 과오와 실패는 당이 진정한 볼셰비키 당이 아니라 노동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섹트적 조직이었던 데에 원인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와 같이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 운동에서 분파문제는 좌우를 막론하고 무원칙한 파벌투쟁으로 파악되고 있다.

 

2)국내 사회주의 분파의 형성과 대중운동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 그리고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국내에 전위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견지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자금을 둘러싼 문제와 전위당 건설에 대한 견해와 차이는 이들 사이에 최초의 대립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신뢰를 상실케 했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합법적인 모습으로 수많은 운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기성회와 조선노동공제회 등이 전국에 존재하는 노동 농민 청년단체를 망라하는 위상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이들 내부에는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1921년 서울 청년회, 1923년 북성회(1925년 북풍회), 1923년 신사상연구회(1924년 화요회), 1924년 조선노동당 등은 제각기 그 이면에 비합법적 공산주의 그룹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후 합법적인 표면단체인 사상단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이 무렵 사회주의 분파들이 독자적인 모습을 띠고 등장하게 되는 데는 19221김윤식 사회장사건19224사기공산당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211월에 조직된 서울청년회는 김윤식 사회장사건’, ‘사기공산당 사건을 겪으면서 그들 내부에 존재했던 이론적 경향들이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적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김사국, 이영을 비롯한 서울청년회 인문들은 192210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강령과 조직체계를 갖춘 전위당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사회주의 분파로서 서울파가 형성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192210월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산업 중심지에 조직적 기반을 확대하기위해 노력했다. 19232공산주의 그룹은 고려공산동맹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공산동맹은 1923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열었다.

서울파가 사회주의 분파로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는 때에 김약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성회 그룹도 까엔당이라는 비합법 전위조직을 창립하여 활발한 대중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38월 무렵부터 그들은 국내에 들어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전사업을 수행하면서 조직화 사업을 벌여나갔다. 그들은 1924417일 까엔당이라는 비합법 조직과 합법단체 건설사를 조직하고, 19241125일 까엔당의 표면단체였던 건설사와 염군사 그리고 개별 사회주의자들을 망라하여 마침내 북풍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조선노동공제회 내부에서 비롯하여 일본의 북성회로 이어지면서 국내 유력한 사회주의 분파로서 자리 잡게 되는 북풍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조선공산당의 창당과정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해체된 이후 코민테른은 1922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르뷰로를 설치하고 코르뷰로는 19235월 국내에 당창건준비기관으로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코민테른은 상해파의 이동휘가 원동부의 대표인 보이친스키와의 의견대립으로 코르뷰로를 탈퇴하자 19244월 코르뷰로를 해체하고 오르그뷰로를 설립한다.

한편 19245월 국내 사회주의 분파들은 통일적인 당창건을 위하여 오르그뷰로와는 별도로 국내 조직국(13인회)를 창립하였다. ‘13인회에는 서울파를 비롯하여 북풍파, 화요파, 상해파, 조선노동당 등 5개 분파의 대표자 13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화요파는 통일적 당 창건을 위한 13인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오르그뷰로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한 상태에서 코르뷰로 국내부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당 창건에 착수한다. 이로써 ‘13인회192495개월 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화요파의 핵심세력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요파는 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면서 서울파를 제외하고 마침내 1925417일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1차 당 대회에는 총 19인이 참가하였는데 김약수, 송봉우, 정운해 등 북풍파 3인과 이봉수, 유진희 , 주종건 등 상해파 3인을 제외한 13인은 모두 화요파였다. 당 대회에서는 조봉암과 조동호를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국내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정식지부로 인정한 것은 1926331일 이었다.

조선공산당은 북풍파, 조선노동당 등과 합동을 재차 추진하여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의 ‘4단체합동총회를 개최하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화요파가 조선공산당 창립을 3단체합동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고 과장하여 보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노동당의 불만을 사게 되고 북풍파 또한 반당행위로 조선공산당에서 정권처분을 받게 되면서 화 노의 3단체 합동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화요파만의 당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 공산당은 당 창건 과정과 창단 이후에도 국내외의 분파들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럼에도 조직 확장에 노력하고 1925년 대홍수의 수해이재민에 대한 원조를 위해 모금활동 등을 벌였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여 노동자 농민 등에게 강연을 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192511월 신의주사건으로 당원의 상당수가 검거되는 조직적 타격을 입으면서 결렬된다. 서울파는 북풍파, 조선 노동당과 3파 합동을 결성하여 코민테른에 통일적 당 건설을 제안하지만 코민테른은 1926331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에서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정식 코민테른 지부로 승인하고 서울 청년회, 북풍회, 조선노동당의 세 그루파를 공산단체로서 승인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분파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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