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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대중조직 운동

by 저너 202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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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1927년부터 1929년 원산총파업광주학생사건에 이르는 시기인바 일시적이나마 민 족통일전선인 신간회의 지도하에 최후의 합법적 사회운동이 일어난 시기이다.

 

1)조선공산당의 해산과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시작

4차 조선공산당은 우경화되는 신간회에 반대하여 신간회 내에서 노동헤게모니를 관철할 것을 공식화하고, 신간회 각 지회에 플랙션을 설치하여 당 정책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810월 초까지 검거자가 속출하여 결국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29년의 원산총파업, 30년의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와 전개에 3, 4차 조선공산당 시기에 결집되었던 조직적 역량이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자들은 계속되는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 당 재건의 기초로서의 대중역량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혁명적 대중조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대중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대규모의 대중투쟁은 바로 다시 일제의 탄압을 초래했다. 대중 투쟁의 결과 대중조직은 물론 당 재건 준비 조직의 존재가 드러났고 조선공산당 재건의 기초가 되어야 할 선진 대중 가운데 다수가 투옥되었다. 조선공산당은 계속되는 지도부의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코민테른이 ‘12월 테제에서 지적한 조선공산주의운동의 파벌주의 적 요소, 조직 구성에 있어서 지식계급, 학생 중심의 편향성문제와 코민테른이 제시한 노동자. 농민 중심의 당 재건 요구로 인해 결국 해산하고 만다.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과 혁명적 대중조직 운동

1930년부터 1937년 중일 전쟁 이 일어난 시기까지인 바 합법적 표현 단체를 잃은 후의 한국 사회운동이 점차 비합법적 투쟁으로 전환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사회개량운동도 사실상 없어지고 그 일부는 친일적인 내선일체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방침은 1931년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 했다.변화의 한 계기는 이 해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에 의해 주어졌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지배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따라서 빠른 시간 안에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당 조직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계기는 1932년 초부터 대중 투쟁이 급격하게 퇴조되기 시작 한 것 이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조직 노선을 채택했다. 새로운 노선의 핵심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량을 생산 현장에서 대중과 결합하고 대중의 투쟁을 지도하는 데 투입함으로써 당 재건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주안점은 혁명적 대중 조직을 강화하는 데 두어졌다.

이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여러 지역 공산주의자 그룹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당 재건의 가능성이 성숙했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이들 그룹의 대표자 회의나 열성자 대화 등의 방식으로 당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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