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공산당의 창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해체된 이후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르뷰로를 설치하고 코르뷰로는 1923년 5월 국내에 ‘당창건준비기관’으로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코민테른은 상해파의 이동휘가 원동부의 대표인 보이친스키와의 의견대립으로 코르뷰로를 탈퇴하자 1924년 4월 코르뷰로를 해체하고 오르그뷰로를 설립한다.
한편 1924년 5월 국내 사회주의 분파들은 통일적인 당창건을 위하여 오르그뷰로와는 별도로 국내 조직국(13인회)를 창립하였다. ‘13인회’에는 서울파를 비롯하여 북풍파, 화요파, 상해파, 조선노동당 등 5개 분파의 대표자 13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화요파는 통일적 당 창건을 위한 13인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오르그뷰로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한 상태에서 코르뷰로 국내부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당 창건에 착수한다. 이로써 ‘13인회’는 1924년 9월 5개월 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화요파의 핵심세력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요파는 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면서 서울파를 제외하고 마침내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제 1차 당 대회에는 총 19인이 참가하였는데 김약수, 송봉우, 정운해 등 북풍파 3인과 이봉수, 유진희 , 주종건 등 상해파 3인을 제외한 13인은 모두 화요파였다. 당 대회에서는 조봉암과 조동호를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국내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정식지부로 인정한 것은 1926년 3월 31일 이었다.
조선공산당은 북풍파, 조선노동당 등과 합동을 재차 추진하여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의 ‘4단체합동’ 총회를 개최하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화요파가 조선공산당 창립을 3단체합동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고 과장하여 보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노동당의 불만을 사게 되고 북풍파 또한 반당행위로 조선공산당에서 정권처분을 받게 되면서 화 ․ 북 ․ 노의 3단체 합동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화요파만의 당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 공산당은 당 창건 과정과 창단 이후에도 국내외의 분파들을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럼에도 조직 확장에 노력하고 1925년 대홍수의 수해이재민에 대한 원조를 위해 모금활동 등을 벌였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여 노동자 ․ 농민 등에게 강연을 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당원의 상당수가 검거되는 조직적 타격을 입으면서 결렬된다. 서울파는 북풍파, 조선 노동당과 ‘서 ․ 북 ․ 노 3파 합동’을 결성하여 코민테른에 통일적 당 건설을 제안하지만 코민테른은 1926년 3월 31일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에서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정식 코민테른 지부로 승인하고 서울 청년회, 북풍회, 조선노동당의 세 그루파를 공산단체로서 승인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분파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2)조선공산당의 활동과 신간회의 결성
조선공산당은 일제 치하에서 수차례의 탄압과 당내갈등, 코민테른과의 관계 등으로 해산과 결성을 반복하는 데, 당명은 조선공산당을 고수하였다. 결국 1차 조선공산당에서 4차 조선공산당까지로 나눠서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1925년 4월 17일 1차 당 대회 이후 1925년 11월 22일의 신의주 사건으로 탄압을 받는 시기까지를 1차 조선공산당이라 한다. ‘타도일본제국주의’, ‘타도일체봉건세력’, ‘조선민족해방만세’, ‘국제공산당만세’ 등의 슬로건을 제시하며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는 2차 조선공산당의 6.10 만세운동으로 이어져 당의 주요 투쟁 강령이 되었다.
신의주 사건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 조선 공산당은 1925년 12월에 검거를 모면한 지도부를 중심으로 후계 당을 조직하였다. 1차당 시기보다 조직을 확대하여 전남도당, 경남도 당 등 도기관을 설치하였고, 북풍회, 서울계열과의 협동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며, 민족주의자와도 만남을 가져 상호제휴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6.10만세운동은 최초의 조선공산당의 조직적 지도로 전개된 반일민족해방투쟁으로 의의를 가진다.
3차 조선공산당의 주요사업으로는 신간회 결성을 들 수가 있다.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로 1927년 2월 결성되었다. 신간회, 근우회로 민족단일전선체론을 구체화 조직화시켰으나 신간회 내부에서의 민족주의 진영과의 갈등, 일제의 탄압으로 한계를 가지나 이후 4차 조선공산당으로 이어지며 활동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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