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회주의 수용의 배경
①사회경제적 조건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한국에서 펼친 초창기 경제정책은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경제를 자국의 재생산체계 순환 속으로 편입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식민지 한국에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근대적 토지소유권 아래에서 종래의 지주제는 온존되고 식민지 통치당국의 보호 하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로 인해 지주계급이 한국사회 내부의 보수적 지배력을 여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농민과 도시 소상공업자들은 끊임없이 파산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은 일제 독점자본의 식민지시장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소경영의 안정화를 보장할 수 있는 조건들을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 가운데서 빈농층이 70~80%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주-소작 관계에 짓눌린 채로 과중한 육체노동과 궁핍한 생활수준을 감내해야했다.
노동자계급은 1919년, 약 20만 명 정도 형성되어있었다. 그중에는 약 4만 2,000명의 공장노동자들이 포함되어있다.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건수가 종전보다 늘어났다. 파업투쟁은 일본인 또는 총독부 직영의 대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노동자들은 파업 외에 반일시위운동에 적극 진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도시 지역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보기를 들면 서울 지역에서 운동에 참가한 ‘죄’로 일제에 의해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노동자는 17%를 점했다. 이것은 3 ․ 1 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투쟁경험에 의거하여 독자적 정치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 1 운동에 참가한 대중들은 자신의 정치적 경험 속에서 맹아적 형태로나마 독자적 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민족독립만이 아니라 ‘재산균분’ ․ ‘토지분배’라는 민중적 이해에 기초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전망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10년대 말 1920년대 초엽 한국사회에는 사회주의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②외부적배경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급속히 확산시킨 계기 가운데 하나는 국제정세의 영향이다. 특히 1917년대 러시아혁명이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끼친 영향은 다대했다. 신생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은 혁명 후 즉시 「러시아인민 권리선언」을 비롯하여 「평화에 관한 선언」,「러시아 및 동양의 모든 근로자에 대한 선언」등을 발표했다. 그를 통해 러시아 내 각 민족들 간의 평등, 각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 모든 민족적 특권과 제한의 철폐 등이 약속되었다. 그것은 아시아 식민지 ․ 종속국 각 민족에게도 고무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로부터 식민지 ․ 종속국의 민족해방운동은 볼셰비키 혁명정부의 물질적 ․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역사발전의 당연한 결과이며, 한국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특히 희망찬 반응을 보였던 것은 한국의 청년 ․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를 한국독립 이후 수립할 “신사회 ․ 신국가 건설운동의 모범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있었다.
한국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전후 고양되고 있는 국제 혁명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독립신문』지상에 게재된 「노동문제 개관」이라는 글에는 그러한 관심이 담겨있다. 그것을 보면, “신문명의 미래를 지배할 2대 원동력이 출현” 했다고 한다. 2대 원동력이란 ‘전 러시아의 피비린내’와 ‘전 유럽의 울부짖는 사람들’이다.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과 유럽의 노동운동 ․ 혁명운동을 지칭한 것이다.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전 민족적 ․ 혁명적 항일봉기였던 3 ․ 1 운동이 일어난 이후, 국내에서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밀려들어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2)사회주의 사상의 국내 도입과 수용
사회주의 사상의 형성 ․ 발전과정은 자본주의 형성과 더불어 성장했던 노동자 운동과 맑스주의 융합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성립한 식민지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었고 이것은 곧바로 민족 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1919년 3 ․ 1 운동은 식민지 민중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3 ․ 1 운동 직전 동경 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서」에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러시아는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상에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 …” 이라고 하며 러시아혁명의 결과에 따른 세계사의 새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식민지 하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1910년대 말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1차 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 혁명운동의 영향, 민족자결주의론에 대한 자각 등의 국제적 조건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따른 민족적, 계급적 모순의 첨예화, 3 ․ 1 운동 이후 정치의식의 고양 등을 계기로 국내 신문, 잡지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수용되었다.
국내에서 3 ․ 1 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 ․ 실천적 무기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회사상을 소개하면서 민족해방 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적 관계, 학맥, 친소관계로 맺어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대중적 실천을 경험하면서 점차 성장해갔다.
1920~1922년 무렵 국내에서 발간된 『개벽』,『공제』,『아성』,『신생활』등 잡지에는 크로포트킨 등 무정부주의에 대한 글이 빈번하게 소개되는 등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이 혼재되면서 그 내부에 분화과정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민중문화의 제창, 자유사상의 고취’를 내걸고 1922년 3월 창간된 『신생활』6호에서 정백은 「노농 로서아의 문화시설」이란 글을 통해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건설된 노농정부는 미술, 연극, 문학, 교육, 정치경제학, 사회과학 등 각 부분에서 새로운 민중적 문화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또 신일용은 「맑스사상의 연구-계급투쟁설」에서 맑스의 계급, 계급의식, 프롤레탈리아 독재에 대한 사상 등을 소개했다. 그는 ‘노동운동의 사명과 무산계급의 독재’ 라는 절에서 다음과 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사상 등을 소개했다.
노동조합운동 일반이 국가나 사회에 대하여 국민적 요구를 제출하는 것인 이상에는 노동당은 노동조합운동 전체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 기초된 노동조합운동이 확실하고 강고함에 따라서 노동당은 더욱 유력한 활동을 하고 능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더욱 결과가 진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단순히 현재 다소의 사업으로써 만족할 것이 아니요 사회변혁의 과정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변혁을 위하여 활동하는 무산계급의 포부의 중력의 초점 및 중심이 될 것을 물론이다. 이 목적의 성취에 가장 유력한 근간은 정권장악이다. 그 원조에 의하여 무산계급은 의식적으로 자본주의의 사회를 사회주의의 사회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견해다. 이 변혁시대에는 일종의 정치적 과도시대가 부수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상태를 무산계급 독재라고 명칭 하는 것이다.
즉, 그는 맑스의 「공산당 선언」, 「고타강령비판」에서 형성되고 레닌의 『국가의 혁명』에서 장식화 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산의 다음의 언급에서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맑스의 『공산당선언』, 레닌의 『국가와 혁명』등을 필수적으로 학습하였음과 무정부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의 이론적, 정치적 변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1921년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기 시작하였다. 우선 『공산당 선언』을 공부한 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그 다음엔 『사회발전사』라는 논문집을 읽었다. 나는 과학적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테러행위의 무익함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찬탄을 금할 수 없으며 내 무정부주의자 친구들 사이에 만연한 동지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이와 같이 러시아혁명과 1919년 3 ․ 1 운동을 커다란 분수령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 소개하면서 사상단체, 비밀 공산주의 그룹들을 조직하여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3)국외 전위정당의 결성과 활동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성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지역적으로 인접하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과 동시에 사회주의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특수성에 있었다. 즉 러시아 지역의 한인 사회주의 단체의 존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919년 3 ․ 1 운동의 정치적 세례와 1920~1921년 내전 시기에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은 활발히 출현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전위당 창립에 노력하여 1918년 4월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나는 정세 속에서 1919년 4월 한인사회당은 블라디보스톡에서 2차 당 대회를 열고 신민회 좌파세력을 포함하여 당 조직을 확대했다. 이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은 조선혁명에 대한 전술문제, 코민테른 가입문제, 코민테른에 한인사회당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여 박진순 등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이후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활동무대를 상해로 옮기게 된다. 이들은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를 창립했다.
한편 1920년 1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 현 위원회 산하에서 한인공산당이 창립되었고 이들도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립했다. ‘상해파’ 와 ‘이르쿠츠크파’ 라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 동시에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국내의 정세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국내에 전위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강령에서 “민족적 해방이 사회혁명의 전제”요 “이 역시 곧 세계혁명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상해파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국내 식민지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를 세워야겠다는 것이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파의 대립은 강령이나 노선 상의 차이보다는 통일전선의 대상과 관련된다. 첫 번째 대립은 상해임정 참여 문제였다. 상해파는 고심 끝에 임정 참여를 결정하지만 이르쿠츠파는 이에 반대하고 대한국민회의 계열과 상해 임정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또 상해파는 베르흐네 우진스크의 통합대회에서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민족주의 진영내의 점진적 문화운동론자를 포함하였으나 이르쿠츠파는 이들에 대해 고립화 정책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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