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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프랑스 68혁명

by 저너 2020.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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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과 노동자의 연합

1954년에 발발해 1962년 에비앙 협정을 통해 종결된 알제리 전쟁은 1956 3월 기 몰레(Guy Mollet) 정부가 선포한, 알제리 파병을 위한 징병령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프랑스인들에게 전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본토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는 여전히 먼 곳에 위치하는 일개 도(departement)에 불과한 식민지였다. 하지만,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였던 알제리 프랑스를 상실한다는 것은 더 이상 프랑스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고, 알제리 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대립은 격화되었다. 군대 의무 복무 기간은 18개월이었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에 연장되었고, 1962년까지 알제리 전쟁에는 약 120만 명의 20세 이상 남성이 동원되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 전쟁은 더 이상 먼나라에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삶에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전쟁을 강요하는 프랑스 정부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이후 제대한 병사들은 젊은 노동자층을 형성해 노동운동의 중심세대가 되었다. 더불어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과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시민들이 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할 수 있었던 정서적 연결고리였다. 이후에도, 1963년 광산노동자들의 총파업, 1968 1월 캉(Caen)에서의 파업 등 노동운동에 학생과 노동자과 연대를 지속하였다. 이처럼, 68 5월 이전부터 학생, 시민, 노동운동은 반전, 반식민지 운동을 계기로 활발한 연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68혁명의 정신 대변체 민중공방

   전국 규모의 총파업이 있던 5 13, 학생노동자미술가건축가디자이너 들이 국립미술학교와 장식미술학교를 점거하고 그곳에 민중공방을 구축한다. 민중공방의 주요 역할은 변혁운동의 투쟁과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동시에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포스터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포스터의 주제는 정치사회적 문제에서부터 일상생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특히 젊은 남녀의 자유분방한 애정행위라든가 일탈적인 행위 등 사회에서 금기시된 다분히 선정적이고 유희적인 이미지와 함께 실렸다. 이것은 도발을 통한 여론 일깨우기의 전략적 방법이었다. 도발을 통해 전통적인 도덕관념과 가치관을 전복하고, 그럼으로써 금지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 작가들의 생각이었다.

민중공방에 모인 미술가들은 포스터 제작 이외에 기존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비판작업에도 착수했는데, 이들에게 기존의 문화(예술)란 예술가를 노동자들로부터 격리시키는 부르주아 문화를 의미한다. 이들에 따르면, 지배계급의 억압적 힘은 예술가에게 특권적인 사회적 지위를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예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 속에 안주한 예술가 모두는 부르주아 예술가로 단죄된 반면 예술가 역시 역사적 현실의 지배를 받는 노동자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노동자로서의 예술가는 민중의 미술을 지향하며, “다른 노동자들의 문제로 시야를 열어놓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미술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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