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와 근대 그리고 발전
한국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식민지 자본주의 아래에서 근대적 사회사상으로서 유입되었다. 사회주의는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전망하는 탈근대 프로젝트로서 근대 사상의 조류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근대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근대적 과제를 혁명의 과제로 제시했고, 이는 대중운동의 방침에서도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 사회주의는 봉건적 유산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대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와 탈근대의 과제를 전망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특히 자본주의 근대가 식민지 근대로 왜곡된 조선에서 사회주의는 근대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기 위해 근대를 거쳐야 하는 모순에 부딪쳐 있었다. 곧 중세 봉건제에서 부르주아혁명, 자본주의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가 필요한 과제였지만, 동시에 근대적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넘어 사회주의로 이행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근대와 발전의 매력적인 모델은 소련이었다. 비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서구 부르주아체제보다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더 적합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근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세계에서 미국과 대결하고 있는 소련의 발전상은 사회주의 근대의 이상이었다. 국내 신문이나 잡지에서 소비에트체제의 수립에 따른 인민주권의 확립, 자본주의 착취제도의 폐지와 국유화, 집단농장과 농민생활의 향상, 급속한 공업화에 따른 산업의 발전 등은 자본주의 국가와 비교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자주 선전되던 소재였다. 하지만 소련이 서방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추진했던 경제계획이나 그 성과에 대한 타당성은 거의 문제되지 않았다. 한계는 있지만, 소련의 경제발전은 아시아 각국과 비교하기 어려운 공업화 기간, 풍부한 천연자원과 기술적으로 잘 훈련된 인적 자원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1920년대의 NEP를 비롯하여 집단농장화 등이 노동자ㆍ농민의 착취와 희생을 바탕으로 위로부터 강압적으로 시행되는 과정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의 근대 프로젝트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로 급속히 이행하는 통과의례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
한국 근현대의 사회주의운동은 일제식민지라는 조건을 반영하여 대중적 수준에서 민족해방과 독립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과제였기 때문에 출발부터 민족주의 성격이 강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피부로 경험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민족의식과 감정은 대중의 가장 보편적 심성이었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일제시기와 해방 후 가장 대중적인 저항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절대화되었다. 사회주의운동에서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을 비롯한 대중동원에 유리한 이데올로기였다. 민족주의는 운동의 목표를 눈에 보이는 敵과 我로 단순화시키면서 대중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투쟁으로 동원하고 운동의 폭을 확대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일찍부터 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내에 사회주의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1919년까지 민족해방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 사상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무정부주의ㆍ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초반에 들어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화되었다. 곧 국내 사회주의운동은 민족주의 전통 위에서 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제식민지라는 민족주의를 작동시켜왔던 광범한 토양과 문화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이며, 민족해방은 계급해방이라고 사고하면서 계급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는 공식 담론의 우선순위나 강조점의 차이로 설명하기 어렵다. 사회주의자들은 우익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일제시기 해방 후 사회주의자들은 '왜곡된' 민족주의를 비판했지만, 민족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시기 이래 한국 사회주의가 민족문제ㆍ민족주의라는 원초적 환경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시아지역에서 사회주의운동이 확산되는 일반적 토양이었다.
사회주의운동과 국제주의
한국 사회주의운동은 출발부터 코민테른과 함께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국가였던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조선공산당이 창립과 함께 세계 혁명운동과의 국제적 연대를 밝힌 이래, 코민테른과 소련의 노선은 국내 사회주의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코민테른ㆍ소련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연대를 도모하는 국제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곧 조선 사회주의자들에게 코민테른ㆍ소련과의 관계는 자기노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기준이었지만, 한편으로 사회주의운동이 코민테른ㆍ소련의 노선에 규격화되고, 나아가 종속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일제시기 국내 사회주의운동이 코민테른이나 소련으로부터 정당성ㆍ정통성을 인정받았던 구조는 내부적으로 운동의 대표성을 둘러싼 분파경쟁을 촉진시키는 요소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근현대 사회주의운동이 지니는 독자성은 상당부분 코민테른ㆍ소련노선의 규정력 수준에 비례하거나 의존하고 있는 셈이었다.
한국 근현대 사회주의운동은 코민테른 소련의 노선에 강제되어있었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창당과정부터 코민테른으로부터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승인경쟁을 줄기차게 벌였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서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하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의 해체와 재건도 코민테른의 결정이나 지침이 기준이 되었다. 코민테른의 결정은 사회주의운동의 보편적 원칙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지만, 국내 운동의 조건을 충분히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코민테른에 의존하여 국내 운동의 기반 위에서 아래로부터 운동의 대표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연히 당이나 개별 사회주의자들이 정세인식이나 정책에서 자율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시기 사회주의자들 가운데는 부분적으로는 코민테른의 노선과 다른 독자성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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